뉴욕 패션 주간의 화려한 막은 올랐지만 패션계는 알렉산더 맥퀸의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의 나이 41세. 언제나 궁금증을 자아내는 창의적이고 드라마틱한 런웨이 무대와 날카로운 테일러드 정신, 그리고 전통을 뒤틀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아방가르드한 실험 정신과 특유의 자신감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같은 무대를 꾸며왔던 그의 죽음은 지치지 않는 크리에이티비티와 세빌로드의 테일러드 정신이 일궈낸 영국 패션의 손실이자 크리에이티비티보다 상업성이 중시되고 있는 현 패션계 지치지 않는 창의성의 마지막 문이 닫힌 듯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의 죽음은 크리에이티비티가 최고조로 만개하고 이제 더 많은 고객과 성공적 소통을 시작한 순간 거짓말처럼 다가와 더 크고 화려한 그의 날개짓을 기대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패션계 깊은 슬픔
실제로 아이티 지진의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기금 마련을 위해 준비된 뉴욕 패션 주간의 Fashion For Relief Haiti 쇼에는 구찌, 크리스챤디올, 버버리, 마크제이콥스, 아르마니, 로베르토까발리, 마놀로블라닉 등 140여명의 디자이너들의 의상이 기증되었지만, 모든 관심은 지난해 10월 파리 쁘레따뽀르떼에서 선보였던 맥퀸의 마지막 컬렉션 “Plato''s Atlantis”의 일부인 7편의 디자인에 집중되었다. 컴퓨터로 프린팅한 가느다란 물뱀 프린트부터 기괴한 바다 생물의 모습, 크리스탈과 주얼리로 장식한 바나클부츠는 다윈의 진화론을 창의적으로 해석한 맥퀸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으로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디자인은 맥퀸 특유의 테크놀로지컬한 솜씨와 창의성을 절묘히 조화시킨 원숙한 솜씨를 느끼게 한다.
또한 알렉산더 맥퀸의 뮤즈인 다프네기네스는 그가 직접 디자인해 선물한 실버세퀸 캣 수트를 입고 행사에 참석,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행사를 기획한 나오미캠벨은 알렉산더 맥퀸에 대한 애정과 깊은 슬픔을 표시, 축제 분위기 여야 할 뉴욕 패션 주간이 그의 죽음으로 다소 엄숙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패션계를 도발하고 자극하는 앙팡테리블에서, 젊은 디자이너들이 흠모하는 자신만의 패션세계 알렉산더 맥퀸을 보내는 패션계의 깊은 충격과 달리 각종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는 맥퀸의 디자인을 고가로 거래하려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호들갑스런 상황이 벌어져 재능 있는 디자이너의 죽음을 곧바로 상업적 이득으로 연결하는 영악한 상황이 씁쓸함을 더한다.
크리에이티비티의 화신, 알렉산더 맥퀸
‘패션계의 앙팡테리블’, 혹은 ‘영국 패션가의 훌리건’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알렉산더맥퀸은 패션계의 권위와 ‘있는 체’를 조롱하는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 상을 4차례나 받고 CBE를 수상할 정도로 창의적 디자이너의 산실인 영국에서도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로 손꼽혔다.
그는 영국 전통 테일러드의 산실, 새빌로우에서 섬세한 테일러링 기술을 익혀 단단한 테일러링 테크놀로지에 크리에이티비티를 접목시킨 절묘한 디자인 세계를 구축, 일부에서는 그를 마지막 정통 ‘꾸튀리에’로 불러왔다.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 세계의 핵심이라 할 상상력은 그의 혈통의 일부인 스코틀랜드, 일명 하일랜드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 중세 마법과 마녀, 근대의 궁정의 귀부인은 물론 거리의 매춘부와 폭력적 섹스까지 거침없이 발휘되었고 드라마틱한 런웨이 무대 구성과 하이엔드 패션계에 대한 거침없는 조롱과 비판은 그의 사생활과 인터뷰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의 패션의 뿌리는 오뜨꾸튀르, 하이엔드이지만 가난한 택시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잔인한 패션 현장에서 직접 재봉과 바늘땀을 거치며 쌓은 패션에 대한 열정과 뒷골목의 거친 남자 같은 외모와 반항적 태도는 햇빛조차 보지 않고 고이 자란 듯 날씬하고 예쁜 남성 디자이너들이 주도하는 패션계에 거친 고원의 하이랜더처럼 야생적인 아웃사이더로 자리했다. 맥퀸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와 16~17세기 프랑스 신교도 위그너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패션 영감으로 활용, 많은 컬렉션에 활용했고 역사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길로틴에 처형당하기 직전 마리앙토와넷이 갇혔던 감옥을 런웨이 무대에 재구성할 정도로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이라도 하듯, 런던 패션 주간에서 플래스틱 베스트에 살아있는 벌레를 가득 담아 등장시켰고, 모델의 의상에 대놓고 성적 언사를 써놓는 등 열정과 에너지와 지독한 자부심과 고집으로 패션계의 거리를 헤쳐왔지만, 몇 년 전 그의 런웨이 피날레를 장식했던 늑대처럼 채워지지 않는 열정과 고독에 힘들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2007년 맥퀸이 디자이너로 출발하는데 크게 조력한 스타일리스트 이자벨라블로우가 자살하고 그에게 깊은 믿음과 사랑을 주었던 숙모가 사망하면서 2008년과 2009년 그리고 사망하기 이전인 2010 컬렉션은 죽음과 환상, 움울함이 짙게 배여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숨기지 못했다. 최근 그의 모친까지 사망하면서 알렉산더 맥퀸은 심한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엔드에서 매스마켓까지 종횡무진
알렉산더 맥퀸의 죽음이 더욱 아쉬운 것은 그의 재능이 하이엔드에서 매스마켓까지 거친 파고를 이루며 영향력을 파급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그너쳐 라벨, ‘알렉산더 맥퀸’을 론칭하며 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맥퀸은 LVMH 산하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디자인 방향에 대한 비판과 LVMH 체제와 타협을 이루지 못해 2001년 지방시와 결별했고, ‘알렉산더 맥퀸’의 지분 51%를 구찌 그룹에 넘기며, 구찌 산하에 들어간 후 2008년 2월 드디어 흑자를 이뤄내며 수익 면에서도 자신감을 회복한다.
이후 2008년 뉴욕 맬로즈 애비뉴에 매장을 오픈하고 밀라노와 런던, 파리에 플래그십을 오픈하면서 적극적 시장 확대를 진행하는 한편 첫 번째 향수 ‘킹덤(Kingdom)’을 론칭, 남성복과 아이웨어 등 사업 부문까지 확장에 나섰다. 기존의 시그너쳐 라벨과 차별적인 좀 더 편한 가격과 디자인의 세컨드 라인, "McQ"를 론칭, 탄탄한 매출과 실력을 인정받으며 더 많은 소비자와 소통하는데 성공했고 샘소나이트와 제휴한 블랙라벨 러기지 라인, 푸마와의 컬레보레이션, 매스리테일러 타겟과의 컬레보레이션을 연이어 펼치면서 하이엔드와 매스마켓 모두 영역을 확대하는 적극성을 보여 왔다.
매스컴을 끌어 들이는 도발적인 자세와 달리 셀러브리티 마케팅을 즐기지 않는 거만한 자세로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그의 고객 리스트에는 기네스펠트로, 사라제시카파커, 비요크, 케이트모스, 리한나, 마돈나, 레이디가가 등 자신만의 스타일 감각을 자랑하는 셀러브리티가 빼곡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죽음이든 그 이면에는 살아남은 자가 알 수 없는 갈등과 아픔이 자리하고 있지만, 갈수록 상업화되어가고 ‘닮아가는’ 패션계에서 자신의 색깔과 크리에이티비티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알렉산더 맥퀸의 죽음은 패션계의 깊은 몰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슬픔의 깊이를 더한다.
[출처 : 패션인사이트 - 기사원문보기]
(34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