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거리를 걷노라면 지나치는 이들 가운데 열에 서넛은 얼굴을 알아보고 귓속말을 속삭인다. "저 사람이 디자이너 장광효"라고.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미흡한 대한민국이지만 딱히 패션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인지하고 있는 디자이너가 바로 장광효인 것이다. ''국민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랜드의 ''스파오''가 장광효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라'' ''유니클로'' 등 해외 SPA 브랜드가 국내 패션 시장을 휩쓸고 있는 가운데 이에 맞설 이랜드의 ''스파오''가 11월초 명동 1호점의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라이벌로 유니클로를 지목하며 국내 패션시장의 지형을 바꾸겠다고 밝히는 포부 속에는 맞수의 파워를 등에 지고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유니클로와 협업을 개시한 ''플러스제이(+J)''의 질 샌더에 비견되고 있는 디자이너가 바로 장광효인 것이다.
서울패션위크와 스파오 오픈을 앞둔 장광효 디자이너는 조급한 기색 없이 여유로운 모습이다. 지난 8월 22일에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콜라보레이션 패션쇼에서는 장광효 특유의 디자인을 SPA 브랜드의 베이직한 콘셉트에 녹여낸 의상 25벌을 공개해 국내 및 아시아 각국에서 몰려든 5백여 명의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오트쿠튀르를 전개하면서도 국내 남성복 디자이너 최초로 홈쇼핑을 오픈해 1천억 이상의 수익을 거뒀을 만큼 트렌드와 대중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평가받고 있는 장광효 디자이너. 이랜드 관계자는 시중에서 한 벌에 3백만~5백만 원 상당의 장광효 디자이너의 슈트를 몇 십만 원의 가격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혀 이목을 끌고 있다.
서울, 나아가 아시아의 패스트패션의 판도를 바꿔놓을 스파오 바이 장광효의 런칭에 앞서, 청담동 장광효의 스튜디오 ''카루소''를 찾았다.
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시트콤 출연이 큰 계기가 된 듯하다.
어디를 가도 얼굴을 알아보니 처세와 행동에 신경을 써야했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즐긴다.
내 본업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트콤만 보고서 ''신인 개그맨 아닌가'' 지레짐작하기도 했지만 차츰 ''어, 저 사람 디자이너였네?''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옷도 만들잖아?''라며 디자이너 장광효를 알아주기 시작했다. 매스컴 활용도 중요하지만 우선 내 분야에서의 경력과 명성이 믿받침 되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결국 운도 실력이다.
운은 물론 자본과 대인관계도 중요하다. 디자이너라고 해서 아티스트 기질만 내세웠다가는 단명하게 된다. 창조력이 중시되는 패션계 역시 질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윗사람 대하는 법이나 조화롭게 일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5년 내지 10년 정도는 직장생활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혼자서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소싱과 인프라가 필요하기 때문에 인맥과 비즈니스 마인드 모두 갖춰야 한다. 혼자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밤샌 뒤 뿌듯해 해서는 안 된다.
요즘 신진 디자이너들은 빨리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데, 빨리 성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밥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자. 가열을 해서 뜸을 들이고, 중간에 어떻게 익는지 저어보고 이런 저런 후가공도 해서 밥을 완성시킨다. 제대로 된 밥이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겨우 몇 년 디자이너로 활동할 것이 아니라 평생 장인으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최근에는 대중들이 먼저 디자이너를 찾는다.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디자이너라는 캐릭터를 갈구하게 된 것 같다. 콜라보레이션이라면 올림푸스 카메라, BMW, 페리에 등 스파오 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랜드에서는 일회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라 장기간 협업할 예정이다. 이제까지 창조적인 아티스트라는 의식을 갖고 임했고, 오트쿠튀르 위주로 선보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라인 전개는 처음 시도하게 된다.
카루소는 현재 청담동 본점 외에는 다른 매장을 찾아볼 수 없는데다 인터넷 유통분은 저가 라인 일부에 불과하다. 라이센스 역시 나와 별개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스파오''는 조금 특별한 작업이 될 것 같다.
스파오가 SM 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사업으로 중국 및 세계 진출을 염두에 둔만큼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계약에 앞서 스파오측에서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옷을 글로벌하게.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들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디자이너 혼자서 세계 시장에 자기 옷을 유통시키기는 어렵다. 국제적인 마켓을 보유한 대형기업과의 협업이 필요하다.
중저가로 낸다 하더라도 내 캐릭터와 꿈, 디테일, 이상,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내 패션 철학을 응집시켜 놓고 싶었다. 특히 중국 및 해외시장에서 하이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랜드라면 막강한 조직력과 판매력을 신뢰할 수 있었다.
스파오와의 콜라보레이션에 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 달라.
스파오에는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 등 SM 엔터테인먼트와 합작한 젊은 룩도 있는데, 장광효 라인은 안성기 씨와 함께 장년층을 타겟으로 한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패턴이지만 일반 SPA매장에서 볼 수 없는 장광효만의 스타일을 살리고 싶었다.
2년 전에 제안이 있었는데 올해 8월에 계약이 이뤄진 뒤 9월 중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약기간은 최소 2년으로 네 번의 시즌을 함께하게 된다.
콜라보레이션 과정에서 이랜드 측으로부터는 ‘장광효 느낌을 살려달라’는 말, 그 외에는 다른 어떤 요구도 없었다.
생산부터 소매, 유통까지 직접 맡는 SPA 브랜드, 혹은 패스트패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SPA라면 인스턴트식품처럼 무난한, 쉽게 사 입는 옷이라고 알고 있다. 스파오에 참여해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옷을 보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다른 무엇을 보태고 싶었다. 컬렉션에서 보이는 의상처럼 장광효 분위기가 흠뻑 배어있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장광효 분위기를 보물찾기하듯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내 디자인 감성을 희석시켜 무난하게 만들까 싶었지만 내가 만들어 디자인한 옷이 아니면 안 된다. 마침 지금 유행이 복고 클래식이기 때문에 80년대 풍의 내 스타일이 주효할 것으로 본다.
이처럼 스파오 중에서도 내 감성이 주입된 독특한 라인이지만 한편으로 누구나 소화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즈를 선보인다. 저렴한 가격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품질, 그리고 장광효가 만들어 디자인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스파오 바이 장광효’의 일차적인 매력이 될 것이다.
곧 패션위크가 개막되는데, 최근 남성복 컬렉션을 보고 느끼는 것은? 열 명 중 한두 명에게서는 가능성이 엿보인다. 신인들 대부분이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자기 색깔을 내비치고서는 카피로 뒤죽박죽되곤 한다. 컬렉션을 위해서 디자이너들은 보통 마흔 몇 벌을 준비하게 되는데 그중 열다섯 벌만, 하다못해 열 벌만이라도 디자이너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
또한 남성복은 무엇보다 ''사내 냄새''가 뿜어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때로 여성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역시 남자옷의 베이직은 양복에 있다. 클래식 스타일을 이해하고 남성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최근에는 전부 캐주얼 일색이다.
이번 시즌 장광효 컬렉션에 대해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무엇일까.
눈여겨볼 만한 아이템이라면 ''승마바지''다. 프랑스 유학시절 산책하던 퐁텐블로 숲속에는 넓은 승마 연습장이 있어서 말을 타는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곤 했는데, 무릎 위로는 폭이 넓고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 꼭 끼는 승마복 ‘조퍼스(jodhpurs)’에서 착안한 것이 바로 승마바지였다.
이것을 당시 신인 댄스그룹이었던 소방차에게 입혀 인기를 끌었고 ‘소방차바지’라고 불리며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그 승마바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전반적으로 80년대 복고풍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 전성기가 80년대였던 만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룩이다. 전반적으로 심플하지만 패드로 어깨를 강조한다던가, 디테일에 80년대 풍이 많다.
인터뷰 시간의 마진에 덧붙여 곧 개막되는 서울패션위크를 어떻게 보면 좋을지 장광효 디자이너에게 물었다.
"일단 처음 참가하는 디자이너의 쇼라면 무조건 봅니다. 쇼를 본 뒤, 이것으로 디자이너의 전부를 보았다고 생각된다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더 본다 해도 새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는 덧붙여 ''지난번 장광효 컬렉션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연배 아래의 기자에게 조심스럽게 묻고서는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한없이 온유한 인상이지만 이면에는 언제라도 자신이 쌓아올린 왕국의 성벽을 무너뜨릴 태세다.
“가까이에서 보니 마크 제이콥스도 주름이 자글자글 하더라.” 27년차 남성복 디자이너 장광효, ''원로''라는 이름으로 묻히기에 아직 너무 젊다.